“판사가 ‘문학이 뭐냐’ 물어 ‘인간을 사랑하는 작업’ 답했죠”

image[한겨레] 【짬】 첫 산문집 펴낸 소설가 남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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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 우리 엄마>(답게). 남정현(85) 소설가의 첫 산문집이란 수식어를 달고 최근 나온 책이다. 하지만 150쪽 정도 되는 책에 실린 산문들은 대부분 2001년 나온 4인(정명환 유종호 최일남 남정현) 산문집 <아름다운 시간의 나무>에 실린 글이다. 2005년 북한 방문기인 ‘5박6일의 성과’만 그 뒤에 썼다. “출판사 대표가 자꾸 내 글만 따로 묶어 책으로 내자고 해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4일 서울 지하철 쌍문역 근처 자택에서 만난 작가에게 먼저 그간 쓴 산문이 왜 그토록 적은지 물었다. “1965년 소설 <분지> 사건으로 쓰고 싶은 욕망이 타격을 받았어요. 그 사건 이후에 청탁도 없었고요.


작가의 최근작은 2011년 <실천문학>에 실린 단편 <편지 한 통-미제국주의 전상서>이다. “손이 떨리고 현기증이 나고 힘도 없어요. 독서도 힘들죠.” 그는 “지금도 좋은 글을 쓰고 싶은데 힘이 없어 못 한다.

(쓸 수가 없어) 드러누워 울 때도 있다”고 말했다. 글쓰기는 어렵지만 느릿느릿 동네 산책도 하고 오랜 친구들과 이따금 만나 밥도 먹는다고 했다.

그는 60년대 초 삼각산 풍경이 좋아 이사 온 쌍문동에서 지금껏 살고 있다. 처음에 산 초가집을 허물고 직접 지은 이층집에서 아들 내외와 산다. <한국방송>에서 외화 번역일을 했던 아내는 1995년 저세상으로 떠났다. “로스쿨 다니는 큰 손자와 2층에서 살아요.

손자가 나를 좋아합니다. 할아비 심부름한다고 집에 일찍 옵니다.”
1958년 소설가 안수길 선생 추천으로 <자유문학>을 통해 등단한 작가는 3년 뒤 <너는 뭐냐>로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1965년 그의 인생에 큰 풍파를 던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외세에 휘둘리는 한반도의 운명과 미국의 제국주의 본성을 풍자적으로 고발한 단편 <분지>로 중앙정보부(이하 중정) 조사를 받고 재판까지 받은 것이다. 반미와 계급의식을 고취해 반공법을 어겼다는 혐의다.

7년 구형에 판사는 죄는 인정하지만 선고는 유예한다고 판결했다. 73년엔 민청학련 사건에 엮여 중정에 끌려가 고문을 모질게 당했다. “기소도 하지 않은 채 8개월 동안 갇혀 있었죠. 이 기간 가족 면회도 안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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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엔 ‘파란 피부의 사나이’ 이야기가 나온다. “74년 중정 취조실에서 온몸이 파란 사람을 봤어요.

맞아서 든 멍이었죠. 너무 놀랐어요. 나중에 들으니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75년 사형당한 우홍선씨라고 해요. 중정 조사를 받다 죽은 최종길 교수(당시 서울대 법대)도 그때 만났어요. 그분이 저한테 ‘나나 남 선생이나 살아 나갈 수 있을까요’라고 하더군요.” 그는 중정 수사관 주먹에 두 볼을 무수히 맞아 30대에 이가 모두 빠졌다고 했다.

“때리기 전에 입을 꼭 다물라고 해요. 풀려난 뒤 보니 얼굴이 사각형이 됐어요. 턱이 아파 병원에 가서 이를 하나씩 뺐죠. 조사 중 졸도해 중정 직원 전용 병원에 실려 갔었죠.”
그는 어린 시절 병약했다. 결핵으로 여러 차례 생과 사를 넘나들었다.

수술도 12번이나 받았단다. “어머니 소원이 아들이 어머니 나이만큼만 사는 것이었죠.

” 어머니는 90살에 돌아가셨으니 장수한 셈이다. 그도 몇 년 뒤면 어머니 돌아가실 때 나이가 된다. “대전 사범을 나온 뒤 발령받은 온양온천초등학교 교사 생활도 아파서 몇 개월밖에 못 했어요. 한국전쟁 때도 대전의 한 병원에서 6개월 이상 뜸 치료를 받았어요.

그 뒤로 좋은 약이 나와 상태가 좋아졌죠.


등단 60년 ‘엄마 아 우리 엄마’ 출간
2001년 공저에 실린 글 다시 묶어
“65년 ‘분지 사건’으로 창작욕 꺾여”
74년 민청학련 때 또 모진 고문
“‘4·19’ 압살 ‘5·16’ 실체는 외세”
올해 85살…남북관계 희망적 전망
작가는 1961년 5·16 쿠데타에서 ‘외세’를 봤다고 적었다. 그날 쿠데타 세력이 몰고 서울로 진입한 미제 탱크에서 “우리 민족의 면상을 짓누르는 엄청난 무게의 실체를 봤다”는 것이다. 그 실체는 분명 외세였단다. 5·16이 터졌을 당시 상당수 진보인사는 ‘일단 지켜보자는’ 태도를 취했다. “다들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말을 이었다. “4·19를 보면서 가슴이 뛰었어요.

그때 난 아프기만 해서 직접 참여는 못 했어요. 지금도 부끄러워요. 4·19는 민족정신입니다. 4·19에서 (외세란) 거대한 바위의 억누름에서 벗어나고 싶은 강한 의지를 봤어요.

(4·19를 통해) 우리 민족의 설움을 한꺼번에 날려버렸어요.” 그는 우리 민족은 대단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서양 역사에서 인간은 다 하늘 아래에 있어요. 하지만 동학은 인간을 하늘과 같은 위치에 둡니다.

동학사상을 잘 발전시켰으면 세계 으뜸가는 나라를 만들었을 겁니다. 지금처럼 (외세에) 예속되지도 않고요.” 박정희 정권 때 경제가 발전하지 않았느냐고 하자 “5·16이 없었으면 남과 북이 합해져 지금보다 2배는 더 발전했을 것”이라고 받았다.
분지 재판 때 판사는 그에게 ‘문학이 뭐냐’고 물었단다.

“인간을 사랑하는 작업이라고 답했어요. 인간을 가장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이들이 바로 소설가입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어요. 인간은 사회에 발 디디고 서 있는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작가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작가는 사회를 형성하는 정치 경제 문화를 깊이 알아야 해요. 그래야 자신의 작품으로 인간을 즐겁게 해줄 수 있어요. 요즘 시를 보면 인간이 붕 떠 있는 존재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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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남 작가의 공부는? “초등 5학년 때 해방이 되었죠. 의사들은 몸에 좋지 않다며 책을 보지 못하게 했어요. 부모님 몰래 책을 봤어요.

당시 교토제국대를 나온 일본 유학생이 사 모은 정치·경제·철학 분야의 일본어책 300권을 다 읽었어요. 세 권으로 된 마르크스 자본론도 다 봤어요. 마르크스와 엥겔스 두 사람은 독일 철학을 안 본 것이 없어요. 헤겔을 완벽하게 정복했죠. 작가는 철학책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책이니까요.

” 그는 동급생 가운데도 탁월하게 일본어를 잘했단다. 이 자유자재의 일본어 실력이 남정현 작가 의식의 자양분이었던 셈이다. 그가 해방 뒤 일본어로 읽었던 사회과학 서적은 20년도 더 지나서 한국에 번역 출판되기 시작했단다.
소설 창작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이 아주 재미났어요.

400쪽이나 되는 장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다 외우려고 했죠. 실제 거의 다 외웠어요.

” 과장이 아니었다. 그는 기자 앞에서 소설 앞 대목부터 일본어로 줄줄 외웠다. “어려운 일본어”라는 메이지 시대 교육칙어도 순식간에 외웠다. 놀라웠다. 80대 중반이란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소세키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고양이를 가지고 인생과 세계를 다 이야기해요.

그때 소설이 참 좋은 것이란 걸 알았죠. (폴란드의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장편소설인) <쿠오 바디스>를 읽고 큰 감동을 받으면서 소설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는 “작가는 책을 읽어야 한다”면서 “책을 읽으면 상상력도 생기고 뭔가를 조직적으로 추구하는 정신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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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남북관계를 희망적으로 본다고 했다. “미국이 시혜를 베푸는 게 아니라 북한이 미국이 겁낼 만큼 핵을 가지고 있어 미국이 협상에 나선 것이죠. (북한 핵을) 해결하지 못하면 전쟁밖에 없으니 미국도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어요.”
그가 안수길 선생 추천으로 등단한 다음해 세 살 아래인 소설가 최인훈도 안 선생 추천으로 <자유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최인훈 작가가 결혼할 때 내가 함진아비였어요.

” 친구 최인훈의 대표작인 <광장>의 스토리가 맘에 들지 않았다는 얘기도 했다. “주인공이 남과 북을 다 거부하고 결국 물에 빠지는 결말이잖아요. 체념 아니냐고 비판했죠. 함을 지고 갈 때도 내가 그 이야기를 했어요.

최 작가는 ‘남도 싫고 북도 싫은 데 어떡하냐’고 해요. 나는 체념하지 말고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죠.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출중한 능력이 있습니다.” 작가는 시인 신동엽이 그의 품 안에서 눈을 감았다는 얘기도 했다.

그는 대학 강의는 들었지만 졸업장은 없다. 전쟁 통에 대전에 내려와 있던 홍익대와 전쟁이 바로 끝난 뒤 서울대 인문대에서 청강생으로 수업을 들었고 옛 서라벌예술대(2년제)는 등록해 1년 동안 다녔다. “미학과란 말이 마음에 들어 서울대 미학과 강의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수업 프린트물을 보니 (내가 일본어로 읽었던) 루카치의 미학 원고를 그대로 베꼈더군요. 도둑놈이란 생각에 정나미가 떨어져 강의를 더 이상 듣지 않았어요.” 서라벌예술대를 1년만 다닌 사연은 이렇다. “2학년 등록금을 당시 음악과 학생에 맡겨 대리 등록을 하도록 했는데, 돈을 가지고 사라졌어요. (이 음대 친구를) 그 뒤로 만난 적은 없지만 아마 음대 교수를 하지 않았을까요 하하.

” 옛 서라벌예술대 수업 중엔 소설가 김동리와 시인 서정주의 강의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김동리 작가는 남의 책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자기 얘기만 해요. 자기 체험이나 자기가 글 쓰는 과정에서 터득한 생각만을 이야기해요. 들을 만 했어요.”
천주교 신자인 작가는 혜화동 성당을 다닌다. “성당에 아무도 없을 때 갑니다.

혼자 앉아 있으면 예수님이 나올 것 같아요. 좋아요. 부모님 모두 성당을 다녔어요. 아버지는 고향인 충남 서산군에서 교육감(현 교육장)을 몇 년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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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3시까지 이어진 인터뷰 말미에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폐암 투병을 하던 아내가 임종할 때 도저히 볼 수가 없었어요.

내가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병실을 나왔어요. 병실 바깥에서 아내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요. 그때 깨달은 게 있어요.

정말 가까운 사이는 임종을 보기 힘들다는 걸요. 하지만 내가 임종 자리를 뜬 것을 두고 처가 식구들이 무척 섭섭해 했죠.” 자택 근처 카페에서 인터뷰를 끝낸 작가는 기자가 쌍문역에서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철 교통카드를 찍는 모습까지 지켜봤다. 그리고 자애로운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기자는) 우리 시대의 빛입니다.” 이어 단장 대신 쓴다는 비닐 우산을 길잡이 삼아 역 계단을 천천히 올라 집으로 향했다.
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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