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서 H.O.T까지…아이돌의 원류를 찾아서

아이돌은 최근에 생긴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한국 사람이 만든 곡으로 한국어로 노래를 부른다면 아마도 과거 어딘가에 시초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 방탄소년단의 빌보드 진출 쾌거가 있기 전에 아이돌은 어디에서 시작했을까? 요즘 주변의 30대 이상인 지인들을 만나면 늘상 묻는 질문이 있다. “아이돌 음악 좋아하시나요?” “아뇨, 거의 안 들어요. 하지만 외국 사람들이 좋아한다니 대단해요.” 현재 외국인들이 케이팝(K-POP)이라고 부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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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아이돌은 최근에 생긴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한국 사람이 만든 곡으로 한국어로 노래를 부른다면 아마도 과거 어딘가에 시초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 방탄소년단의 빌보드 진출 쾌거가 있기 전에 아이돌은 어디에서 시작했을까?
요즘 주변의 30대 이상인 지인들을 만나면 늘상 묻는 질문이 있다.
“아이돌 음악 좋아하시나요?”
“아뇨, 거의 안 들어요. 하지만 외국 사람들이 좋아한다니 대단해요.”
현재 외국인들이 케이팝(K-POP)이라고 부르는 한국가요계에 아이러니한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 3분의2이상은 거의 듣지 않는 음악, 지상파 음악차트방송 시청률 0%대를 기록하는 아이돌 음악이 세계에서 국위를 선양하며 대한민국을 견인하고 있는 것이다.
공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국의 보이, 걸그룹이 노래로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면 무척 대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 국민의 애국심을 피어나게 하는 아이돌그룹은 어떻게 세계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일까? 아니라면 몇몇 천재가 만들어낸 결과물일까?
한국 최초의 아이돌 ‘아이들(IDOL)’
한국 최초의 아이돌은 누구일까? 이 질문의 답은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의 보컬그룹이 등장해 인기를 얻고,
서울시내에 고고장이 우후죽순 생겨나던 시절, 음악신동 최이철은 트럼페터였던 아버지 최경용과 작은아버지 최상룡의 영향을 받아 소문난 기타리스트로 성장했다.
그는 일찍이 미8군에서 음악을 시작하다가 1971년 일반에 잔출해 명동 오비스캐빈, 고고클럽 닐바나 등에서 밴드활동을 시작했다.
최이철의 활동을 지켜보던 드러머 김대환은 그에게 음반취입을 권유했고 최이철은 6인조 밴드로 첫 음반을 녹음했는데 이 보컬그룹의 이름이 바로 아이들(IDOL)이었다.

1971년 성음레코드에서 발매된 아이들의 음반은 재킷에 ‘IDOL’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최초의 앨범이었다.
‘아이들’은 영어 발음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아이돌’이 아닌 ‘아이들’로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록과 팝 등 다양한 장르를 연주했다.
멤버들은 모두 1952년생들로, 만 19세 청년들이었다.

이 음반은 현대에서 말하는 아이돌의 범주에 넣기에는 미흡하지만
멤버 최이철이 1978년 사랑과 평화를 결성하기 전에 소속된 팀이라는 점에서 가요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이 음반은 현재에는 LP로 재발매가 되어 노래를 들어볼 수 있지만 한때 수집가들의 표적이 되기도 한 희귀본이었다.
그렇다면 아이들의 인기는 어떠했을까. 음반의 소개말에는 ‘아이들’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1952년생ㄷㄹ로 이뤄진 6인조 보컬그룹으로 미8군에서 5년의 수련과 국내에 약 6개월의 경력을 소유하고 급격한 상승일로를 달리는 국내 최선두를 자랑하며
데뷔 1개월도 못되어 동양방송 영페스티발(매일밤 11:35분) 수요일 프로 IDOL HOUR(아이들 아워)가 생길 수 있는 영광을 차지한 국내유일의 희망그룹입니다.”
중고생들의 우상이던 ‘소방차’와 ‘야차’
최초의 아이돌을 살펴보았으니 오늘날의 아이돌을 말하기 전에 아이돌의 정의를 내려보도록 하자.

현재의 아이돌은 회사의 철저한 기획과 마케팅, 매니지먼트 시스템에서 훈련을 거쳐 만들어진 가수나 그룹을 의미한다.
가수들이 자신의 인생이나 생각이 가미된 노래를 부르기보다는 거대한 자본의 논리에 따라 음악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것이다.
또 아이돌은 칼군무, 화려한 사운드와 무대 퍼포먼스, 충동적인 10대를 만족시킬 수 있는 또래의 미남미녀들, 강력한 팬덤등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모습이 확립되기 전 1980년대에 들어서면 비슷한 형태의 그룹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시작은 바로 소방차였다.
소방차는 김태형, 이상원, 정원관으로 구성된 삼인조 댄싱그룹으로서 아이돌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이들은 1954년 동갑내기들로, 명동 YMCA에서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다가 만난 사이였다.
세 사람의 데뷔는 1984년 KBS TV ‘젊음의 행진’의 댄싱팀 ‘짝꿍’에 합격해 활동하면서부터였다.

이후 가수가 되기 위해 함께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추며 연습하던 중 연예기획사였던 한밭기획과 계약하고 1987년 첫 데뷔를 하게 된다.
소방차는 덤블링, 브레이크댄스 등을 무대에서 선보이며 10대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충성도 높은 10대 팬덤이 생긴 것도 이즈음이었다.
재미나게도 소방차 팬클럽 이름은 ‘삐뽀삐뽀’ ‘소방대원’이었다.
한편 유현상(보컬), 김도균(기타) 주축의 헤비메탈밴드 백두산은 질풍노도와 저항을 품은 젊은이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얻으며
메탈 밴드로서는 유일하게 KBS TV ‘가요톱10’ 순위차트에 진합하는 등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반항기 섞인 의상과 시끄러운 사운드 때문에 보수적인 한국사회가 그들의 활동을 용납하지 않아 늘 경찰과 검찰의 표적이 되었다.
망연자실 속에 밴드를 그만둔 유현상은 홀로 일본으로 떠났다.

한국보다 한참을 앞서 간 일본의 대중음악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유현상은 당시 일본 청소년들을 열광시킨 여가수 나카로리 아키나와 7인조 보이그룹 히카루 겐지를 눈여겨보고 귀국해 백두산기획을 설립했다.
그 결과로 탄생한 백두산기획의 첫 가수는 이지연이었고 다음은 댄스그룹 야차(YACHA)였다.
야차는 연예인 혼성그룹 푼수들(김진만, 김혜선, 안정훈, 전수경 등이 멤버였다)에서 활동하던 부산 출신 조진수를 중심으로
김뎡수, 손민석, 송희존, 안원철로 구성된 5인조 댄스 보이그룹이었다.
이들은 “애! 애! 애! 애타는 마음”을 외치며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역동적인 춤을 추면서 ‘롤라장’ 세대들에게 큰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히카루 겐지를 지나치게 모방했다는 비판도 상당했다.
결국 야차는 이 앨범을 끝으로 해체했고 멤버 중 조진수는 ‘ZAM’을 결성해 인기를 얻어갔으며 김병수는 ‘벅’을 결성해 ‘맨발의 청춘’을 히트시켰다.

서태지와 아이들과 SM의 매니지먼트
혹자들은 가요계를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전과 후로 나눌 정도로 이들의 등장은 파격적이었다.
문화대통령이라는 창호를 받을 정도로 10대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에 경도되었다.
1997년 삼성경제연구소가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부터 4집을 역대 국내 최고의 히트 상품으로 평가할 정도였다.
랩, 록, 댄스를 결합한 음악을 선보인 서태지와 아이들은 팬덤, 매니지먼트, 이미지 메이킹 등에서 기존의 것들과는 달랐다.
아이돌을 ‘우상’으로 해석하던 시기에 진정한 청소년을의 우상은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청소년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헤어, 의상, 춤 모든 것을 따라 했다.

그런데 당시의 기성세대가 가장 당황했던 것은 이들이 학업을 제대로 이수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학생들이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한다며 학교를 그만두는 일이 다수 발생하자
서태지와 아이들이 TV방송에 출연해 자신들을 따라 학업을 중단하지 말라고 호소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사회 변화와 함께 가요계에 1996년 두 개의 팀이 탄생하는데 하나는 2인조 그룹 ‘아이돌’이며 또 하나는 아이돌의 시초로 꼽는 H.O.T다.
‘아이돌’은 과거 영화배우로 활동하다가 도미한 나오미의 아들 최혁준과 춤 잘추기로 유명한 이세성으로 구성된 팀이었다.

이들은 외국인고등학교 출신으로 춤과 팹을 잘했지만 10대들의 방송출연 금지와 외국인학교의 엄격한 출석관리로 ‘BOW WOW’ 한 곡의 히트를 끝으로 활동을 마감하고 만다.
비슷한 시기에 가수 이수만은 유학에서 보고 느낀 미국의 연예매니지먼트 시스템과 마케팅을 국내에 도입하고 연습생 신분의 가수지망생들을 키우고 있었다.
몇 해 전 SM기획을 설립하고 야심차게 현진영을 내세웠지만 그가 불미스런 사건에 휘말려버렸고 김광진, 한동준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이수만이 새로운 대안으로 출범시킬 H.O.T는 매니지먼트 사업을 계속할지 말지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선택이었다.

이 어려운 갈림길에서 H.O.T가 청소년들 사이에서 빅히트하면서 아이돌 그룹의 시대를 열었다.
H.

O.T는 노래, 퍼포먼스, 멤버들의 이미지, 캐릭터 상품 개발 등 모든 면에서 가수, 앨범등을 산업화시켜 한국 가요계를 한단게 격상시켰다.

H.O.T의 인기는 우리나라에 머물지 않고 동남아로 퍼져나가면서 매출액과 문화적 파급면에서 이전의 것들과 다른 시장을 창출해나갔다.
이후 젝스키스, 핑클, S.E.S 등이 연달아 배출되면서 아이돌은 명실상부한 문화의 흐름으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많은 지면이 필요한 이야기이지만 일련의 음반에서 보듯 오늘날의 아이돌은 1970년대부터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져왔다.
비록 아이돌이 부르는 노래들이 국민 공통의 공감대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1980년대 후반에 김완선, 박남정이 등장했을 때도 기성세대들이 ‘들을 음악이 없다”며
비난을 퍼부은 과거를 비춰보면 멀지 않은 미래에 아이돌 가수들의 음악 또한 국민에게 위안이 되는 노래로 다가갈 수 있으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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