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준 칼럼] 노동정책 엇박자의 해법은 어디에

한겨레 강신준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 노동자를 “대화”나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교섭”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 노동민주화의 본령으로 가는 그 길이 촛불 이전 30%의 지지율에 갇혀 있던 민주당의 한계를 뛰어넘는 길이자 지금의 엇박자를 해결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희한한 일이다. 지난주 민주노총이 최저임금법 개정을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였다. 노동자를 위해 입안한 정책을 노동계가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최저임금뿐일까? 주 5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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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 경제학과 교수
노동자를 “대화”나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교섭”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 노동민주화의 본령으로 가는 그 길이 촛불 이전 30%의 지지율에 갇혀 있던 민주당의 한계를 뛰어넘는 길이자 지금의 엇박자를 해결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희한한 일이다. 지난주 민주노총이 최저임금법 개정을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였다. 노동자를 위해 입안한 정책을 노동계가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최저임금뿐일까? 주 52시간 노동의 강제시행도 6개월 유예되었고 전교조의 법적 지위 문제도 연가투쟁으로 이어졌다. 잔뜩 미루어진 출소를 하면서 한상균 전 위원장은 “문재인 정부는 노동과 거리가 멀다!”고 토로하였다.

게다가 쌍용자동차에서 30번째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결국 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은 공약으로 내걸었던 사회적 대화의 중단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의 취임 후 첫 행보가 최대 노동 현안인 비정규노동을 겨냥했던 것을 떠올리면 정부 여당으로서는 안타까운 일이다. 의지와 현실의 불일치가 크게 나타난 것이다. 급기야 정권 내부에서 볼썽사나운 분열상도 새어 나오고 있다. 여당 대표와 고용노동부 장관 사이의 불협화음이 그것이다. 취임 초기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노동계에 당부했던 대통령의 말씀은 무색해져버렸다. 이런 엇박자는 친노동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갇힌 노동자 수가 역대 최대였던 노무현 정부의 역설을 보는 듯한 불길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좋은 의도로 포장되어 있다.” 의지와 상반되는 이 엇박자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미국과 독일의 대비되는 사례가 힌트를 준다.

미국 역사상 가장 친노동적이었던 와그너법은 출발점에서 치명적 결함을 안고 있었다. 입법 과정에 미국 노총이 불참한 것이다. 노동운동의 무관심 속에 이 법은 이후 태프트 하틀리법과 랜드럼 그리핀법으로 계속 개악되어 사실상 형해화되고 말았다. 그 결과 미국 노동자들은 선진국에 걸맞지 않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 원색적 자본가의 전형이랄 수 있는 트럼프에게 기대를 거는 기막힌 상태를 자초하고 있다.
독일은 반대의 사례를 보여준다.

패전 직후 노동운동은 교섭권을 확보하기 위한 단체교섭법의 입법을 주도하였고 이후 모든 노동 의제에서 한사코 발을 빼지 않았다. 심지어 매우 수세적인 국면에서도 적극적 참여를 통해 교두보를 확보해왔다. 테일러주의에 대한 적극적 임금정책, 유연 생산방식에 대한 노동의 인간화, 구조조정에 대한 일자리 연대, 유연화에 대한 에라(ERA) 임금체계협약이 바로 그런 교두보들이다.

그 결과 독일 노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짧은 노동시간과 가장 높은 시간당 임금을 누리고 있다.
이들 두 나라의 극명한 대비는 노동문제의 해결 방식을 명확하게 알려준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당사자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는 민주주의의 원리가 바로 그것이다. 교섭자율주의로 알려진 노동민주화의 핵심이다. 그래서 여당 대표가 고용노동부 장관을 힐난했다고 전해진 말에서 엇박자의 원인을 짐작할 수 있다. 노동정책을 노동자들에게 “잘 설명해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노동자를 문제 해결의 적극적 주체가 아니라 온정을 베풀 대상으로, 그래서 설명과 설득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시각이 엿보인다.
미국 노동자들이 목을 매는 최저임금법이 독일에서는 2015년 이전까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엇박자의 해법을 시사해준다.

미국에서 최저임금은 정부가 베푸는 온정이지만 독일에서 그것은 노동조합이 스스로 결정하는 교섭임금이었다. 그래서 해법은 분명하다. 최저임금도, 노동시간도 모두 노동자가 스스로 교섭을 통해 결정해야 한다.

정부가 할 일은 함부로 나설 것이 아니라 이런 교섭을 위한 제도적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다.
노동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노조 할 권리”를 외쳐왔다. 기업단위 고용에 기초해 있는 현행법이 비정규노동자의 교섭권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을 포괄하는 초기업노조의 교섭권을 법제화하는 것이 엇박자 해소의 첫걸음이다. 독일의 단체교섭법이 그 전범이다.

물론 이 법도 정부 여당이 일방적으로 만들어주어서는 곤란하다. 결성된 지 10년이 넘도록 아직 초기업 교섭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보건의료, 금속 등 산별노조들의 적극적 참여 속에 교섭을 통해 만들어야 한다.

이유는 분명하다. 스스로 만든 것은 다시 빼앗기지 않지만 남이 만들어준 것은 언제든 도로 빼앗길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를 “대화”나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교섭”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 노동민주화의 본령으로 가는 그 길이 촛불 이전 30%의 지지율에 갇혀 있던 민주당의 한계를 뛰어넘는 길이자 지금의 엇박자를 해결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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